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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수 김상희

풍차돌 2023. 6. 7.

가수 김상희

가수 김상희의 본명은 최순강입니다. 김상희는 1943년 3월 29일에 태어났으며, 올해 80세입니다. 김상희의 고향은 경기도 경성보이며, 시보류청과 남편 류훈근, 아들과 함께 살고 있습니다.

김상희는 풍문여자고등학교와 고려대학교 법과대학 법학과를 졸업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김상희는 "순만"이라는 예명으로 활동하며, 뱅 스타일의 머리카락으로 이마를 가리는 것이 트레이드 마크입니다.

김상희는 여자 학사 가수 1호라는 수식어로

유명합니다. 풍문여고 시절에는 대단한 수재로 이름을 떨쳤으며, 항상 1~2등을 차지하고 노래 실력도 뛰어나다는 평가를 받았습니다. 하지만 결국 집안의 염원대로 고려대 법대 법학과로 진학하게 되면서, 1961년 KBS 전속 가수로 데뷔합니다.

그러나 당시 대학교 재학생의 경우 연예활동은 퇴학을 의미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김상희는 얼굴 없는 가수로 활동하게 되었습니다. 예명을 사용하게 된 이유도 자신의 가수 활동을 집과 학교 모두에게 숨겨야 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공개방송 무대에는 1절 나서지 않고, 녹음 방송만으로 활동했기 때문에 인기가 없었습니다. 당시 김상희는 이곳에서 실력을 갈고 닦아서, 나중에 아주 유용하게 써먹게 되는데, 바로 최초 여성 가수 출신 MC가 되기 위한 기반을 이곳에서 닦게 됩니다. 대학에 합격한 후 우연한 기회에 서

울 중앙 방송국 전속 가수 모집에 참가해서, 최고 득점으로 합격하는 결과를 얻으면서 가수의 면모를 드러내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명문 대생인 그녀에게 있어 가수 생활은 집과 합격, 양쪽 모두에게 숨겨야 하는 비밀이었고, 이에 김상희라는 예명을 쓰게 됐습니다. 이와 함께 얼굴이 알려질 것을 염려해 공개 방송 무대에는 1절 나서지 않았고, 녹음 방송만으로 가수 활동을 했습니다. 이 같은 최씨의 과거 활동을 하는 연예계 일부 관계자들은 "얼굴 없는 가수 이론은 최순강이다" 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1965년 대학 졸업과 동시에 가수로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한 최씨는 가진 재능을 펼쳐, 70년대 후반까지 매년 히트곡을 꾸준히 발표하면서 인기 가수로 자리매김 했습니다.

김상희는 1961년 KBS 전속가수로 데뷔하지만, 실질적인 가수 활동은 1965년부터 시작됐습니다. 국내 여자 학사 가수 1호라는 수식어로 주목받으며, 1960년대와 1970년대 대중들의 큰 사랑을 받은 국민 가수로 대표곡으로는 "코스모스 피어있는 길", "울산 큰 애기 대머리", "총각", "경상도 청년", "금산 아가씨" 등이 있습니다.

김상희는 또한 전매특허인 뱅 헤어스타일, 짧은 미니스커트 등 시대를 앞서가는 패션을 소화해 가요계의 패션 아이콘으로 불리며, 당시 일본, 미국, 홍콩 등의 세계 무대로도 진출한 바 있습니다. 2018년에는 공로를 인정받아 대한민국 경제문화공원 대상 가수 부문 공로상을 수상하기도 했습니다.

최순강씨는 60-70년대 히트곡 제조기였으며, 지성과 미모, 노래 실력 등 3박자를 모두 겸비했다는 대중들의 평가와 함께 최고의 인기를 누렸습니다. 당대의 작곡가들과 손을 잡고 최고의 인기를 누린 최순강씨는 1968년 KBS PD였던 유훈근씨와 결혼했습니다. 유씨는 정언 제게 등을 아우르며 넓은 활동 영역을 가진 인물로 유명세를 탔습니다. 그는 1964년 KBS PD로 입사하고 MBC로 이적하여 제작국 PD를 거쳐 보도국 기자, 차장, 뉴스 앵커 등을 역임하며 언론계에서 입지를 굳혔습니다. 또한 1981년에는 학교법인 시사학원을 설립하고 초대 이사장으로 취임해 고등학교를 세우기도 했던 인물입니다. 즉, 유흥구는 전주 지역의 명문 집안의 아들이었습니다. 김상희와 남편 유흥근은 가수와 PD, MC와 PD의 관계로 함께 일을 하게 되면서 연인

으로 발전했습니다. 먼저, 남편 유훈근이 김상희의 재능을 알아보고 MC를 제안했다고 합니다. 유훈근 김상희를 보니 나이도 어린데 엄청 가니 컸습니다. 깡이 좋았습니다. 대포가 보통 큰게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MC 한번 하라고 했습니다. 아랫배에 희만 주면 된다고 하고 시켰습니다. 하지만 당시로서는 여자 MC는 전혀 없었고, 가수 출신 MC도 없었던 상황에서 KBS 간부들을 설득시키는 것이 무척 어려웠다고 합니다. 결국 그 프로그램이 실패하면 사표를 내겠다고 해서 겨우 시작했습니다. 물론 김상희는

음악 살롱에서 다져진 MC 실력이 있었기에 크게 성공하게 됩니다. 이후 가수 출신 MC, 여자 MC가 나온 것도 김상희가 전례를 만들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라고 합니다.

하지만, 둘을 이때에도 무난하게 결혼했던 것이 아니라 큰 우여곡절을 겪어야 했습니다. 이유는 유훈근이 사선 위원인 요청의 아들로서 종가집 7대손 장남이었기 때문입니다. 종가집 종손 며느리를 어떻게 딴따라 봤나 절대 안 된다고 반대가 심했습니다. 조선극장을 경영했던 우리 집안도 한가락하는데 거기 시집본에서 물 묻히는 거 못 본다고 반대했습니다. 양측의 반대가 심했는데, 결국 남편이 어른들

안 오면 우리 둘이 하겠다고 선언했습니다. 결국 양가 식구들 모두 결혼식장에 참가하고 어쩔 수 없이 서로 며느리 사위로 인정하게 됩니다. 두 사람은 결혼 이후 아들 두 면을 낳게 됩니다. 유훈근은 이후 KBS에서 MBC로 이직을 했고, 보도부 차장으로 일하다가 정치와 인연을 맺게 됩니다. 아버지가 사선 국회의원이었던 경험은 나에게 큰 영향을 주었습니다. 또한, 약 10년 만인 1988년 전주갑 지역구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하게 되었습니다. 당시에는 대다수가 유훈근이 공천을 받게 될 것이라고 예상했을 정도로 강력한 후보였고, 전주갑이 유흥근 아버지의 지역구였기에 유흥근으로서는 각별한 의미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막판에 오원에게 뒤집기를

당해 마지못해 출마를 포기해야 했습니다. 이후, 김대중 전 평민당 총재에게 배신당했으며, 결국 유흥근은 무소속으로 출마하게 되었습니다. 당선 즉시 평민당 복권하는 캐치플레이를 내건 반면, 야권 통합의 기술원을 내걸고 평민당을 배척한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그리고 선거 결과 유흥꾼은 낙선하게 됩니다. 이후 유흥구는 정치에 환멸을 느낀 것인지, 손을 뗀 후 전문 경영인으로 활동하게 됩니다. 김상희는 남편 유훈근이 김대중과 결별한 후, 80년대 군사정권의 탄압을 받았습니다. 이는 단순히 유훈근의 아내라는 이유로 방송 출연이 금지된 것이었습니다. 이후 김상희는 무대에 설 기회가 점점 줄어들며, 나중에는 이화여대 옆 단평짜리 공간에서 샌드위치를 팔았을 정도로 생활고를 겪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이런 어려움을 김상희는 특유의 대인관계로 헤쳐나갔습니다. 사실 김상희는 한국 가요계에서 대인관계가 좋은 여가수 세손가락 아내들 정도로 성격이 원만합니다. 그리고 김상희

는 자신의 일원 장점을 좋은 방향으로 사용합니다.

또한, 최씨는 지난 1999년 아들 유모 씨의 군면제를 위해 군의관에게 천만원을 건넨 혐의로 서울지방검찰청에 불구속 기소되기도 했습니다. 당시 검찰에 따르면 최씨는 지난 1995년 8월, 서울 강남구 압구정동 K은행 지점에서 예비역 대령인 소모 씨에게 나들이 병용면제 대상인 제2국민 역 판정을 받을 수 있도록 잘하는 군의관에게 전달해 달라하며 천만원을 제공한 혐의입니다. 이에 검찰은 병역면제를 받았던 김씨의 아들이 병혁용 신체검사를 다시 받게 하도록 병무청에 요청키로 한 바 있습니다. 하지만 기소 3개월 후인 같은 해 12월, 서울지법은 최순강씨에 대해 제3자뇌물교부제를 적용하여 벌금 100만원을 선고하는 판결을 내린 것으로 알려졌고, 사건은 1달러 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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