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에는 중견 여배우와 탤런트 남윤정의 별세 소식이 들려오고 있습니다. 그 속에서도 연이은 김지미 배우의 별세 소식을 듣게 되어 마음이 조금 불안해졌습니다. 그래서 김지미 배우의 근황이 궁금해져서요. 김지미 배우는 우리 기억 속에 살아 숨쉬고 있습니다. 어떻게 지내고 계신지 정말 궁금합니다.
김지미 배우는 그 당시에도 미모가 아름다웠습니다. 세련된
화장법이 아니라도, 생글생글한 눈빛과 여성스러운 몸매, 시원시원한 미소까지. 60년대와 70년대 여배우라고 해도 그 미모가 손색이 없습니다. 당시에는 탤런트들과 비교해봐도 당당히 미인 중의 미인이었습니다.
1959년에는 미국 할리우드 감독 존 포드가 김지미 배우를 보고 "당신은 아시아 최고의 미인입니다"라고 극찬한 일도 있었습니다. 서양인들도 그녀의 아름다움에 마음을 빼앗겼을 것입니다.
특히 지금은 외국에서조차 한국의 성형외과를 찾아 이른바 성형 관광이라는 것을 즐길 정도로 많은 여성들이 찾는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당시 김지미 씨는 얼굴을 단 한 곳도 손보지 않은 자연산 미인으로 유명했습니다. 물론 외모뿐만 아니라 영화배우로서 김지미 배우가 당시에도 독보적인 연기력을 가진 것도 칭찬받아야 하겠지만, 말이지요.
김지미의 전 남편 홍성기와는 1958년부터 1962년까
지 함께 살았고, 최무룡과는 1963년부터 1969년까지, 나훈아와는 1976년부터 1982년까지, 이종구와는 1991년부터 2002년까지 결혼 생활을 유지했습니다. 지금이야 재혼이 크게 흠잡힐 일은 아니지만, 당시만 해도 이렇게 헐리우드 배우처럼 삶을 산 사람들이 몇이나 될까요?
최근 배우 김지미의 근황이 인터뷰로 전해진 적이 있는데, 정말 홀가분하게 사시는 것처럼 보이더군요. 미인 박명이라 하더니 그건 또 아닌가봅니다. 최근까지 김지미 배우의 근황을 보면 행복하게 살고 있으니 말이죠. 김지미 리즈 시절에 대한 젊은 사람들의 관심도 여전한 것을 보면 미애 기준이라는 것은 크게 변함이 없다는 생각도 듭니다. 우리나라 60년대, 70년대, 80년대, 90년대를 통틀어 여배우 미모 순위에서 가장 높게 평가받는 또 한 명의 배우, 정윤희 씨의 근황에 대해 여러분과 함께 하는 시간을 가지는 게 어떨까 싶네요.
김지미는 4번의 결혼과 4번의 이혼이라는 화려한 경력도 있습니다. 김지민은 데뷔 다음 해 18살 나이로 12살 연상의 영화감독 홍성기와 1958년 결혼 후 자녀 1남 1녀를 두고 1962년 이혼했습니다. 이후 인기가 도를 달리던 최무룡과 1962년 두 번째 결혼을 하면서 딸 한 명을 낳았습니다.
그리고 계속되는 영화 흥행 실패 등으로 1969년 최무룡과 이혼하게 되었으며, 이후 1976년 6살 연하 가수 나훈아를 만나 큰 이슈가 되기도 했으며, 혼신신고를 하지 않았고 사실혼관계로 지내다 다시 이혼하고, 마지막 4번째 결혼은 심장질환 전문의 이종구 박사와 1991년에 혼하면서 결혼 11년 만에 성격 차이로 이혼했습니다.
1960년대를 대표하고 화려한 프로필을 가지고 있는 여
배우 김지미는 영화계의 아주 큰 별이었고, 인생도 화려했던 것 같습니다. 나이가 들어도 여전히 아름다운 미모를 자랑하는 김지미. 그 이름만큼 인생도 대단하셨던 것 같네요.
결혼을 위해 상대를 선택할 때에는 누구나 신중할 수밖에 없다. 결혼 전후로 인생이 나눠질 수도 있을 정도로 결혼은 인생의 매우 크고 중요한 이벤트이기 때문입니다. 이에 대한 미혼 여성들의 고민을 덜기 위해 결혼 선배로서 김미경 강사가 tvN 스타트 강쇼에 출연하여 결혼 전에 신경 써야 하는 조언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1980년대에는 자신의 영화사인 지미필름을 설립하고 인권택 감독과 콤비를 이루면서 길소뜸과 티켓이라는 일생일대의 역작들을 제작했습니다. 그러나 인권택 감독과 함께한 작품 외에는 영화들이 수준 이하의 범작들이었고, 이후 영화인 협회 회장과 영화진흥위원회 위원이 되었으나 영화인들의 신고 세대 다툼 속에 욕만 먹고 물러났습니다. 영화 수입도 했는데, 마지막 황제가 바로 지미 필름에서 수입회와 1988년 흥행 1위를 차지한 경우입니다. 로보카 한편 역시 지미 필름에서 수입해 와서 대박을 친 케이스 홍콩의 액션스타 왕후가 김지미에게 반해서 자신의 영어 이름을 지미로 지었다는 도시전설이 있습니다. 소설가 황성령이 무릎 학도사에 출연해서 밝힌 바에 의하면, 황성령이 중학생 수영선수 시절 안양유원지 수영장에 놀러 갔을 때 마침 영화 촬영차 거기 와있던 김지미가 수영장 물에 빠뜨렸던 선글라스를 찾아준 적이 있었는데, 그때 본 김지미의 미모를 생각하면 아직도 떨린다고 밝혔습니다. 선글라스 찾아줘
서 고맙다면서 그 예쁜 누나가 촬영장으로 데려가서 참외도 깎아주더라는 이야기도 덤입니다. 한때 신내림을 받았다는 소문이 돌아다니기도 했는데, 역시나 사실무근이었습니다. 마지막 영화는 이장호 감독 영화 '명자 아끼꼬소냐'인데, 당시 거액을 들여 일본과 러시아를 오고가면서 촬영했지만, 흥행이나 평가는 대실패였습니다. 이 영화의 실패로 제작과 배급까지 하던 김지민은 커다란 손해를 보았고, 결국 지미 필름도 1년도 못가 문을 닫아야만 했습니다. 임의중 연이었던 김지미가 주연을 맡았는데, 20대 나이까지 소화를 하는 바람에 실수가 나올 지경이 없다고 합니다. 2021년 3월에 기사를 보면, 현재는 미국에서 거주하며 지내는 것으로 보입니다. 90년대 후반 이후 운동권에 영향하에 있던 젊은 세대의 영화인들의 정치적 편향성을 비판하는 인터뷰를 종종 하였습니다. 특히 당시 노무현 정권의 열린우리당 창당의 주역이며 선거나 각종 시국 현안에 나서 적극적인 정치유세를 벌였던 명계남문성근을 콕 집어
서 비난했습니다. 이로 인해 진보 측 지지자들로부터 엄청난 비판을 받고 있습니다.
2011년 9월 조선일보와의 인터뷰에서 명계남문성근을 직접 언급하며, "영화인 협회 안에서 문제를 해결하면 될 것을 다른 단체를 만들어 데모만 해 영화계 물을 흐렸고, 9세대들을 다 물러가라고 했다면서, 이런 식이면 공산당과 뭐가 다른가"라고 발언하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문화일보 인터뷰에서는 문성근을 지칭하며 "배우가 정치색을 띄면 안 된다. 오로지 좋은 연기자가 되는데 전력을 다해야 한다."라고 말했습니다.나는 50여년 배우 생활을 하면서 이렇게 박수를 받지만, 그때 설쳤던 아이들은 생명이 끝났지 않았느냐"면서 "걔네들이 아직 활동하는가"라고 발언했습니다.
2010년 부산국제영화제에서 김지미 본인의 회고전을 하자, 영화제 측에서 지나친 의전 요구를 하였다고 하여 구설수에 올랐다. 당시 김지미가 요구한 조건은 자신의 친인
척 지인들을 위한 특급 호텔 객실 30개와 함께 자신의 지인들이 이동할 수 있는 대형 버스였다고 한다. 주최측은 객실 15개와 전용 버스를 대절해 주는 선으로 마무리를 했다고 한다.
영화제 주최측에서는 그간 쌓여왔던 신구세대 영화인들 간의 갈등과 분열을 봉합하고 서로 화합하자는 좋은 취지로 김지미의 회고전을 주최하였지만, 당시 젊은 영화인들이 실질적으로 보이콧을 하는 바람에 결국
김지미의 회고 전에는 강수연 등 친분이 있던 일부 후배 여배우들을 제외하고 대다수의 젊은 영화인들은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정치적 성향 등의 문제로 그녀와 감정의 골이 쌓여 있던 영화계 주류는 김지미 회고전에 대해 그녀만의 축제로 끝났다고 말하며 냉소와 비웃음이나 던졌다. 이후 2017년 한국 영상자료원의 시네마테크 KOFIC에서는 김지미의 데뷔 60주년을 기념하여 김지미의 회고전을 또 다시 주최했다. 대중의 우려에도 불구하고 이런 대접을 받는 이유는 김지미가 영화에서 누린 인기는 상상이 안 갈 정도로 엄청났기 때문이다. 이미 데뷔 때부터 최고의 미녀로 유명했으며, 60년대의 1세대 여배우 트로이카가 활개를 치던 시기에 파란만장한 가정사를 안고도 꾸준히 인기를 유지해 나갔으며, 이미 여배우로서 생명이 다한 80년대에도 길소뜸, 티켓 등의 흥행작을 낸 배우이다.
대한민국 연예계 여배우 중에서 이 정도로 올해 최정상급으로 인기를 유지한 여배우는
최은희, 윤정희, 장미희 정도뿐이다. 사실 김지미가 위에서 보여준 후배 영화인들에 대해 거만하고 콧대 높은 태도가 이런 화려한 본인의 영화계 인생에서 비롯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홍성기와 결혼한 김지미는 홍콩의 합작 영화를 촬영하러 갔다가 최무룡과의 만남이 시작되었다. 사실 김지미와 최무룡은 당시에도 톱스타였기에 겹치기 출연이 굉장히 많았고, 두 사람은 많은 작품에서 호흡을 맞추며 친해졌다. 거의 매일 만난 셈이다. 어쨌든 이것이 계기가 되어 연인으로 발전했다.
그러다 1962년, 당시 한국 최고의 톱스타 최무룡과 간통 혐의로 함께 구속되었다. 수갑을 찬 두 사람의 행복해하는 모습에 당시의 언론은 연일 화제가 되었다. 지금 관점으로도 충분히 파격적이지만, 당시 시각으
로는 그야말로 초대형 스캔들이었다. 결국 1963년, 최모룡은 아내인 배우 강요실과 이혼하는데, 이때 이혼 위자료를 김지미가 지불했다. 그 당시 대한민국 최고의 위자료인 400만원을 지급하면서 또 다시 화제가 되었다. 당시 400만원은 이로 헤아리지도 못하는 거액이었다. 심지어 6년 뒤 최무룡과 이혼할 때도 김지미가 이혼 위자료
를 전부 부담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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