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호
배호는 대중 가수로서 한국에선 이름이 나있을 정도로 유명합니다. 그가 어떻게 태어나 어떻게 살아갔는지, 고통과 애통하므로 점철된 삶을 비춰봤습니다.
배호는 중국 산동성에서 태어났으며, 부친의
독립운동 때문에 중화민국 국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1945년 8월 광복을 맞아 대한민국 국적을 취득했습니다. 배호의 가족은 독립투사의 집안이었으며, 배호의 형제들은 일찍 죽었습니다. 그래서 배호는 11세 아래의 여동생이 태어나기 전까지는 혼자서 자랐습니다. 광복 후 부모는 인천의 한수용소에서 생활하다가, 1946년 4월부터 서울 창신동의 일제 적산가옥에서 살았습니다. 배호는 찢어지게 가난한 생활을 하면서 자랐으며,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다시 부모를 따라 부산으로 가서 피난 생활을 했습니다.
1955년 서울 창신국민학교를 졸업한 배호는, 그
해 8월 21일 부친의 사망으로 가족을 따라 또 다시 부산으로 내려가서 모자원에서 지냈습니다.
배호는 삼성중학교에 입학해 1학년 때 배신웅으로 개명했고, 2학년 때인 1956년 중퇴하고 다시 서울로 돌아왔습니다. 중학교 중퇴 이후에도 계속 가난에 시달리다가, 서울로 올라온 대호는 중국 지난 대학 음악과 출신으로 작곡가이자 MBC 문화방송 초대 악단장을 지냈습니다. 넷째 외숙부 김광빈의 수하에서 드럼을 배워 대중음악을 시작하면서 김광귀낙단에 드럼 주자로 미8군 무대와 방송국 등에서 활동했습니
다. 배호는 12인조 배후와 그 악단 밴드를 결성해 서울 종로 낙원동에 프린스 카바레 등에서 활동하며 이름을 알렸습니다. 1957년에서 1964년까지 배호는 일본 메이지 대학 문예과 출신의 바이올린 연주자로서 서울중앙방송 악단장과 1964년에서 이듬해 1965년까지 TBC 동양방송 악단장을 지냈습니다. 셋째 외숙부 김광수 그리고 넷째 외숙부 김광빈 악단 동화 천지 MBC 학단 김인배 악단 등에서 드럼을 연주하며 음악 활동을 시작했습니다.
배호의 외가에는 이들뿐만 아니라 둘째 외숙부 김광옥도
일본에서 음악대학을 졸업한 후 유명 교향악단의 지휘자로 활동했습니다. 이처럼 4명의 외숙부들 중 세 분이 음악 전문가였던 사실을 보면, 배호의 음악적 재능은 외가 쪼개서 물려받은 것으로 보였습니다. 그가 음악에 천부적 재능을 타고난 것임을 알 수 있는 게 학교를 다닌 것이라곤 중학교 중퇴가 고작이어서 음악을 제대로 배운 적이 없어 악보를 잘 읽지 못했음에도 소리만 듣고도 바로 연주를 할 수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배호가 가수로 데뷔한 것은 굿바이를 블러 데뷔한 1963
년 21세 때였으며 이 곡에 이어 바로 사랑의 화살도 발표됐지만, 본격적인 가수 생활로 들어간 것은 그 이듬해 22살 때인 1964년에 두메산골과 굿바이로 음반을 내면서부터였습니다. 그의 목소리는 그때나 지금이나 아무도 흉내를 내지 못하는 독특한 음색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대중에게 쉽게 각인되기 시작했습니다. 데뷔 음반으로 발매된 '두메산골'은 도라지를 외국어처럼 살짝 굴리는 것이 정말 독특했습니다. 배호 자신도 제 창법이 참 건방지게 멋있다는 말을 들었다고 말한 바 있습니다. 하지만 반대로 기성 대중음악계에 텃세도 없지 않았습니다. 그가 데뷔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한국일보의 정홍택이라는 기자는 배호 노래를 "깡패 노래"라고 혹평하기도 했습니다. 이 소리들은 배호는 한동안 깊은 고민에 빠진 적도 있었습니다.
암튼 넷째 외숙부 김광빈이 지어준 배호라는 예
명을 쓰기 시작한 것은 이때부터였고, 그가 안경을 쓰기 시작한 것도 이 무렵이었습니다. 드럼을 배워서 드러머 생활이 시작된 시절이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1966년, 대호에게 시련이 닥쳤습니다. 생각하지도 않게 신장염이 발병한 것이다. 치료 여건이 요즘 같지 않던 시절이었습니다. 당신은 의료기술이나 약이 요즘처럼
발달한 시절이 아니었으니 쉽게 낫지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노래를 멈추지 않았습니다. 그때부터 사망할 때까지 배호는 쉬지 않고 신곡을 냈습니다. 그에게 노래는 생명과도 같은 것이었고 삶의 전부였습니다. 하지만 지병은 더 깊어만 가지고 몸 상태는 날이 갈수록 악화되었습니다.
신장염이 발병했음에도 그해 그는 황금의 눈, 지구 레코드, 홍콩 예순 6번째, 신세기 레코드 두 곡을 더 추가했습니다. 이듬해 1967년 3월, 장충동 녹음실에서 취입했을 때는 한 소절 부르고선 펄썩 주저앉았을 정도로 건강이 악화되고 있었습니다. 그런 상태에서 그 해 25세의 나이로, 그가 병상
에서 헌신의 햄을 다해 불러 투입한 신곡이 바로 배상태가 작곡한 '불새추를 돌아가는 삼각지'입니다. 아세아 전속였습니다. 이 곡을 작곡한 대상태가 이 노래를 부를 적당한 가수를 몇 년간이나 찾아도 찾지 못하다가 병상에 누워있던 대호를 찾아가 사양하던 그를 설득해 병석에서 부르게 됐다는 가슴 아픈 뒷얘기가 있습니다.
그런만큼이 노래는 앨범이 무려 20만 장이나 팔려 크게 히트함으로써 대호를 톡 가수 반열에 올려놨을뿐만 아니라 음악 차트 사상 드물게 20여주 연속 1위를 기록한 그의 대표곡입니다. 나도 이 노래를 즐겨 부르곤 하지만 그 애절함과 허무감은 절절이 가슴에 맺히게 하는 곡입니다.
배호는 가수 사상 드물게 첫 히트곡 1위에 오른 뒤 4개월 만에
MBC 방송 10대 가수로 선정됐습니다. '돌아가는 삼각지' 외의 '도누가 울어', '안개속으로 가버린 사람', '안개낀 장충단공원' 등이 연달아 히트하면서 배호는 20대 중반의 젊은 나이에 1967년 방송사들이 수유하는 가수상을 휩쓸었습니다. 돌이켜보면 1967년에서 1968년, 즉 25세에서 26세의 2년간이 가수로서는 가장 영예로운 시절을 보낸 셈이다.
여러 언론사들이 주최한 가요 행사에서 가수상도 수상했거니와 MBC 방송 10대 가수 외에도 TVC 방송 가요대상도 받았으며, 치솟는 인기 덕분에 각종 영화에도 출연했으니까. 1971년 10월, 대호는 라디오 이종환의 '별이 빛나는 밤에' 출연을 마치고 귀갓길에 비를 막고 갔다가 감기에 걸려
그만 신장염이 재발될 병원에 재입원했습니다.
그런데 인생의 최후 단계에서 배호에게 오헨리의 소설처럼 가슴이 먹먹하게 슬픈 일이 벌어집니다. 그가 이번에 있던 병상 곁에는 1년 동안 떠나지 않고 간호해주던 7세 연하의 여성이 있었습니다. 이 여성은 가슴 아픈 사연의 주인공이 되었습니다.
배호는 7세 연하인 여성과 만나 배후와 장례까지 약속한 사이였습니다. 그러나 두 사람의 사랑은 오래가지 못했습니다. 숨을 거두기 하루 전에 배호는 그녀에게 자신의 손목시계와 반지를 건네주면서 자기를 떠나라고 했습니다. 그녀가 살아있다면 지금 초반에 나이가 일 것이며, 지금도 배호 노래를 들으며 살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하늘이 낳은 불새출의 가수 배호는 1971년 11월 7일 운명했습니다. 그해 배호는 29살이었으며, 미혼이었습니다. 그의 가수로 활동한 기간은 15세 되던 1957년부터 1971년까지 14년이었지만, 본격적인 가수 생활은 9년 뿐이었습니다. 나머지 5년은 드럼을 치는 캄보밴드와 함께 보냈습니다.
감사함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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